제목 : 동기회 순방・32회 등록일 : 2005-06-24    조회: 900
작성자 : 사무국 첨부파일:
지난 6월21일 오후 12시 30분. 시내 <등나무식당>에서 32회 동기회의 모임이 있었다. 이를 취재하기 위해 남기진 부회장과 필자가 참석했다. 이날 나오신 선배님은 장석호(회장), 곽영수(의사), 권병일(전 호산나 산부인과 의원장), 김호영(변호사), 박두표(명예교수) 등 다섯 분이었다.

32회는 입학 당시 100명이었는데 이동 상황이 많았지만 전학도 오고해서 98명이 졸업했다. 모교에는 박두표(국어), 손병희(성경), 이명두(일반사회), 김득진(기술), 송정헌(영어), 장갑득( ) 등 여섯 분이 교사로 근무했었다.

-「우리가 입학 당시의 교장은 핸더슨 선생님이었는데 머리가 희고 키가 크다는 것이 생각나. 그러다가 3학년 때 가네꼬(김석영)교장이 왔는데 그는 진주사범과 일본의 귀족학교인 경응대학을 나온 분이지. 우수한 조선인이라 뽑혀 오셨는데 당시 폐교될 계성에 친일파 교장을 둠으로 해서 그나마 계성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지.」

「아침 조회 시마다 일본 긍성요배를 했어. 교장이 앞에 서고 전교생이 같이 했는데, 당시 핸더슨 교장은 피압박 민족인 우리에게 해방자 같은 느낌이 들었어.」

「결국 일본이 핸더슨 교장을 미국으로 쫓아내었지. 본국으로 가시는 날 그때가 해질 무렵이었어. 대구 역에는 헌병대가 좌악 깔려있었지만 우리는 쫓겨가면서 눈물로 핸더슨을 환송했어. 부산까지 가는데 경산역 등 몇 군데서 환송의 횃불도 있었어.」

「나는 핸더슨 교장으로부터 악수를 배웠어. 그것은 민주주의, 평등주의를 의미했지. 봉건주의에 익숙한 당시 그 악수가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으나 차츰 거기에 적응되었고 참 이색적인 학교구나 싶었어.」

그 당시 교사진도 수준 급이었다. 특히 정재각(동양사), 박태준(음악), 신후식(성경), 손계술(물리), 이성우(영어), 이흥원(생물) 선생님 등 모두 존경스러웠으나 특히 수학을 담당한 권용택 선생은 좌익사상을 갖고 수시로 이북을 내왕하였다. 이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이 1시간 강의할 것을 10분으로 끝내고 “또 모르나?”하면서 서너번 문제를 풀어도 시간이 남을 정도로 명쾌한 수업이었다. 일본이 패망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며 학생이 질문하면 대답 대신 웃기만 하였다. 러시아 탱크의 철판이 뚫린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풀이했으며 그 무렵 라디오로 세계정세를 알고 계신 분이었다.

「청송 출신 김봉조 선생은 국회의원도 하셨어. 그 분은 가끔 수업 중에 “나는 만주에 가서 50만 대군을 양성, 조선을 독립하려고 했다”며 침을 튀기며 말한 것을 기억해. 좀 허황된 것 같지만 매료될 수밖에...정말 간이 큰 선생님이었어.」

일본인 교사 중에도 반일사상이 있는 분도 있었다.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공, 관립학교에 가지 않고 계성에 올 수 있었다. 당시 조선말을 하면 전부 퇴학이었다. "웃을 때도 일본말로 웃어라"할 정도였다.

그러나 재학생들도 열등감이 없는 게 아니었다. 대구고보, 농, 상고에 떨어져 계성에 왔는데 와서 보니 교장이 미국사람이라 이게 학교인가 싶었는데 2, 3년 지나니까 비로소 계성에 대한 자부심과 의식이 생겼고 졸업 후 사회에 나와서야 계성의 교육이 앞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쟁으로 수학여행을 못 가고 대신 완전복장으로 집총해서 경주까지 행군했다. <모든 문은 영문(營門)으로 통한다.> 했을만큼 그 당시엔 군사훈련이 우선이었다.

「당시 유도장 뒤에 무기고도 있었고 숲 속에 산지기 집이 있었는데 대낮에도 들어가기 겁이 날 정도로 나무가 울창했어. 학과를 빼먹고 그 곳에 가서 몰래 담배도 피고 했는데 뻐꾸기 소리도 들렸어.」

「교문에서 우측으로 관사(교사 사택)가 10채 가랑 주욱 붙어 있었어. 기와집으로 방 2개에 마루가 있었지. 아담스 교장 사택은 신명학교 언덕에 있었고 가네꼬 교장 사택은 일본사람 관리 관사가 밀집해 있던 현 대구백화점 자리에 있었어.」

「그 당시 계성은 축구가 강했어. 한번은 서울에서 전국 대회에 참가하고 내려온 선수들을 보니 전부 멍이 들고 약을 바른 상처 투성이었어. 그 당시 축구는 기술보다 주먹같은 힘이 경기를 좌우했던 것 같아.」

가네꼬 교장은 사택 현관에 <국어(일어) 상용의 집>이란 작은 현관을 내다 걸었다. 그만큼 제국주의 의식이 철저했다. 동기생 가운데 누가 교장 댁에 ‘오물’을 소포로 보낸 사건이 있었다. 그러자 헌병대가 와서 내사하고 했으나 지금까지 누가 그랬는지 모른다. 사택으로 돌을 던진 경우도 있었다. 결국 가네꼬 교장은 8.15 다음날 도망가듯 대구를 떠나고 말았다.

「우리가 4학년 때 상급생 한 명이 신명여고 학생과 연애하다 들통나 퇴학 당하고 말았어. 그러자 동기생이 <졸업장>을 만들어 저학년을 교문 앞에 도열시키고 그 사이로 학교를 떠나게 한 일이 있어. 퇴학당한 그 선배는 모자까지 흔들며 당당하게 나갔는데 그런 일도 계성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었지.」

「동급생으로 다니던 재단 이사장 김성재 아들은 2학년 때 유급 당했는데 학칙이 얼마나 엄격했는지 알 수 있어. 김성재씨는 당시 1만원을 들여 학교 담을 벽돌로 쌓았어.」

그 무렵 일년에 한두번 전교생은 학교에서 앞산 비행장까지 행군해서 분열식에 참가했다. 다른 학교는 군대식 나팔이 있었지만 박태준 선생이 지휘하는 계성 악대는 당시로는 세계적이어서 모든 사람을 신명나게 하는 음악이었다.

「도자호 동기생은 집이 고령이었는데 차가 없으면 걸어서 대구까지 오는데 길가의 논에 모심는 사람들이 교복 입은 도자호 모습이 신기하고 귀해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는 거야.」

「입학시험 칠 때는 ‘세금납부고지서’가 필요했는데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입학이 허가되었지. 유지급 아니면 입학 할 수 없었어. 사범학교는 풍금, 미술에 뛰어났지만 우리는 공부, 사고, 행동에 뛰어난, 그때만 해도 세계화된 학교였어.」

「그때 우리는 교복, 교모, 교화를 착용했는데 교복은 청바지 색이었고 국방색 모자를 썼어. 구두는 돼지가죽으로 만들었고 가방은 군대식 배낭을 메었어. 당시 구두 값은 7,000원이었는데 우리 때부터 신기 시작했지.」

32회의 모임은 1960년쯤 창립되었는데 정두용(작고) 동문이 초대회장을 맡았다. 사실 32회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일제 말기에 졸업했고, 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6.25가 발발했다. 그런 고생은 아마 32회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다. 젊고 힘이 있을 때는 서울 지부와 합동으로 용평에서 스키를 타기도 했고 수안보에 모여 온천을 즐기기도 했다. 송정헌 선생 아이디어로 과거시험 보러 가는 선비 기분을 내기 위해 문경 세제를 오르내린 낭만도 있었다.

이날 모임을 끝내면서 장석호 회장은 후배와 함께 오랜만에 옛날로 돌아가 그 시대 당시를 이야기하니 젊어진 것 같다며 거의 모두가 현직에서 은퇴하였지만 내년의 모교 개교 100주년을 맞아 미력이나마 돕겠다고 말했다.

-글. 이수남(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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